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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상세보기

나무아미타불

조회 1364

박병철 2003-11-14 23:05:14

<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 border=0>
<TBODY>
<TR style="LINE-HEIGHT: 120%">
<TD class=founderdown width="100%"><FONT size=2><FONT class=invitetext><B>청화 큰스님 입적(入寂) (11/12 오후 10시 30분)</B><BR><BR><XHTML><X-META content="Namo WebEditor v4.0" name="GENERATOR"><XBODY>
<TABLE style="BORDER-RIGHT: #b8860b 7px dashed; BORDER-TOP: #b8860b 7px dashed; BORDER-LEFT: #b8860b 7px dashed; BORDER-BOTTOM: #b8860b 7px dashed; BACKGROUND-COLOR: #cd9b1d" cellSpacing=3 cellPadding=3 width=617 bgColor=#cd9b1d border=1 table>
<TBODY>
<TR>
<TD width=601>
<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align=center border=0>
<TBODY>
<TR>
<TD width=580 bgColor=#ffffff>
<CENTER>
<TABLE borderColor=green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 background=http://nami2.com.ne.kr/bg6/a307.jpg border=1>
<TBODY>
<TR>
<TD>
<P align=center><FONT color=white size=5>청화 큰스님 입적(入寂)(11/12 오후 10시 30분)</FONT></P>
<P><IMG src="http://www.donga.com/news/donga_album/album_images/718/13-2000.jpg" width=600></P>
<P><FONT color=white size=5>청화 큰스님께서 11월 12일(수) 오후 10시 30분 </FONT></P>
<P><FONT color=white size=5>세수 80세, 법랍 57세로 성륜사 조선당에서</FONT></P>
<P><FONT color=white size=5>열반에 드셨습니다.</FONT></P>
<P><FONT color=white size=5></FONT></P>
<P><FONT color=white size=5>나무아미타불!</FONT></P>
<P><FONT color=white size=5>----------------</FONT></P>
<P><FONT color=white size=5>청화(淸華) 큰스님께서는 24세시 백양사 운문암에서 송 만암 대종사의 상좌이신 금타(金陀) 대화상을 은사로 출 가,득도하셨습니다. </FONT></P>
<P><FONT color=white size=5>이후 50여년간 대흥사, 진불암, 상원암, 남미륵암,월출 산 상견성암, 백장암,벽송사, 백운산 사성암, 혜운사, 태 안사 등 성지의 토굴에서 묵언, 일종식 및 장좌불와의 좌 선으로 오로지 수행정진하셨으며, 원통(圓通)불법을 선 양하고, 엄정한 계율의 준수와 염불선을 주창하셨습니 다.</FONT></P>
<P><FONT color=white size=5>----------------------</FONT></P>
<P><FONT color=white size=4>주소 ; 성륜사聖輪寺 전남 곡성군 옥과면 650번지, </FONT></P>
<P><FONT color=white size=4>전화 ; 061-363-0081 </FONT></P>
<P><FONT color=white size=4>교통편 </FONT></P>
<P><FONT color=white size=4>1. 광주고속터미널에서 옥과행 시외버스 → 옥과에서 택시 → 성륜사 (광주-옥과15분간격 배차, 약45분 - 1시간 소요, 옥과- 성륜사 택시요금 3,500원) </FONT></P>
<P><FONT color=white size=4>2. 광주고속터미널에서 택시- 성륜사(택시요금 25,000∼30,000원) 광주터미널에는 고속버스와 시외버스가 같이 있습니다.)</FONT></P>
<P align=center><BIG><FONT face=굴림체><FONT size=5><FONT color=white><B></B></FONT></FONT></FONT></BIG></P>
<CENTER>
<CENTER><BIG><FONT face=굴림체><FONT size=5><FONT color=white><B><IMG src="http://www.ciz.co.kr/cizmail/images/character/1_1262_2.gif"><IMG alt="" src="http://hi.bosar79.com/bbs/data/banerboard/flo38.gif" border=0> <IMG src="http://www.ciz.co.kr/cizmail/images/character/1_1262_2.gif"></B></FONT></FONT></FONT></BIG>
<CENTER>
<UL><PRE><BIG><FONT face=굴림체><FONT size=5><FONT color=white><B><IMG src="http://nami2.com.ne.kr/home/f08.gif"><IMG src="http://nami2.com.ne.kr/home/f50.gif"><IMG src="http://nami2.com.ne.kr/home/f08.gif"></B></FONT></FONT></FONT></BIG>
<PRE><PRE><PRE><PRE><PRE><PRE><PRE> </PRE></PRE></PRE></PRE></PRE></PRE></PRE></PRE></UL></CENTER></CENTER></CENTER></TD></TR></TBODY></TABLE></CENTER></TD></TR></TBODY></TABLE></TD></TR></TBODY></TABLE><EMBED style="LEFT: 0px; WIDTH: 286px; TOP: 1426px; HEIGHT: 46px" src=http://www.songgwangsa.org/cyber/asf/bany.asf width=286 height=46> </XBODY></XHTML></FONT></FONT></TD>
<TD class=founderdown noWrap width=10 rowSpan=4> </TD></TR>
<TR>
<TD class=founderdown>
<P><BR>  <불교춘추 1997년 11월호 통권 8호에 실린 내용입니다.></P>
<P><BR>    하루 한 끼 공양과 손수 빨래 등으로 청빈한 삶 실천</P>
<P>    종파성을 지양하고 원융한 원통불교 지향</P>
<P>    한국불교의 진수, 미국 땅에 꽃 피</P>
<P>        -최석환(불교춘추 발행인)</P>
<P>      청화 큰스님 그는 누구인가<BR> <BR>세수 75세인 청화스님은 '40년간의 장좌불와', '하루 일종식', '염불선의 실천자' 등 <BR>수많은 수식어가 뒤따르고 있다. </P>
<P>청화스님을 따르는 불제자들도 자연히 스님을 보는 것만으로 희열을 느낀다고 한다. <BR>"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데 앞길을 이끌어 주는 스승이 있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BR>모릅니다. 어두운 밤길에 등불과 같은 분이 청화큰스님이십니다." 이남덕(전 <BR>이화여대)교수의 말이다. 최하림시인은 큰스님을 일컬어 '맑은 꽃 비상하게 자기를 다스린 <BR>사람에게만 느껴지는 향훈'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P>
<P>청화 큰스님이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스님은 40년간을 <BR>주로 토굴에서 생활해 오다가 12년전 태안사를 맡고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BR>청화큰스님이 태안사를 맡은 것은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을 일으키려는 <BR>염원때문이었다.</P>
<P>동리산문은 혜철선사에 의해 개창된 이래 폐사 직전에 청화스님이 주석하면서 <BR>선문구산을 되찾게 되었다. </P>
<P>현재는 뜻있는 수행승에게 태안사를 맡기고 캘리포니아 금강선원에 주석하고 있다.</P>
<P>일본 메이지 대학 유학<BR> <BR>1923년 전남 무안군 운남면에서 태어난 청화스님의 속명은 강호성이다. 청화라는 법명은 <BR>그의 스승인 금타스님에게서 받았다. 14살되던 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5년제 중등학교 <BR>과정을 마친 후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국내에 들어와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BR>친구들과 함께 고향에 망운중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다. </P>
<P>이후 대학 진학을 결심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메이지대를 1년간 다니다가 <BR>징병으로 국내에 끌려왔다. 진해에서 얼마동안 근무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평소 진보적인 <BR>의식을 갖고 있던 그는 좌우익의 대립된 양사에 심한 갈등을 느꼈다.그의 출가는 <BR>무엇보다도 좌우익의 대립에서 출발되었다. 그러나, 출가를 결심한 뒤에도 심적 갈등은 <BR>여전했다</P>
<P>금타스님을 은사로 출가<BR> <BR>부모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친 강호성은 끝내 출가의 결심을 꺾지 않았다. 청화스님은 <BR>출가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가 청년시절부터 철학을 좋아해서 동서양서적을 <BR>섭렵했습니다. 동양철학을 공부하다보니 자연히 불교서적을 접하게 되더군요. <BR>불교입문서를 보고 나름대로 윤곽을 잡았었죠. 그런 뒤 절에 있던 집안의 육촌 동생이 <BR>공부하기 좋은 곳이 있다고 해서 바로 따라 나섰습니다. 처음에는 절에 가서 공부도 하고 <BR>수양도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금타 화상을 보는 순간 미련없이 출가를 해버렸지요."</P>
<P>한 집안의 장남으로서, 또 부인과 아들을 하나 둔 가장으로서 그의 출가는 집안의 극심한 <BR>반대를 필연적으로 안고 있었다. 스님은 장성 백양사 운문암에서 금타화상을 만나 <BR>스승으로 모시고 불문에 들었다. 금타스님은 호남불교를 일으킨 송만암선사의 제자로 <BR>조계종 종정을 지낸 서옹스님과 함께 수학했다. 청화스님은 금타화상을 스승으로 <BR>모셨으니 연담문하가 된다. </P>
<P>연담문하는 만암선사에 의해 호남불교의 큰 기둥을 세운다. 그 문하에 서옹스님이나 <BR>금타스님같은 이가 배출되었고 청화스님은 금타스님의 가름침을 받아 정통 통불교사상을 <BR>주창했다. 청화스님의 사상적 핵심은 금타화상의 절대적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루 한 끼 <BR>공양과 40년 동안이나 눕지 않는 장좌불와의 수행법은 바로 스승 금타화상의 <BR>영향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P>
<P>청화스님은 금타대화상의 가르침이 흐려지고 있는 것에 대해 애석해 하고 있었다. <BR>"금타대화상은 과학적인 시대에 금자탑을 이룩한 획기적인 분인데 사람들은 그 분을 <BR>비방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시대를 초월한 원통불교를 주창한 인물입니다"</P>
<P>금타화상은 1940년 "우주의 본질과 형량"이라는 글을 발표할 만큼 현대물리학에도 조예가 <BR>깊었던 듯하다. </P>
<P>한국불교의 정통인 통불교를 주창해 온 금타스님의 그러한 사상과 수행법이 <BR>청화스님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자신의 40여년간 토굴생활 또한 몸에 밴 스승의 <BR>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P>
<P><BR>금타화상은 하루 한 끼를 공양하고 짚신을 손수 삼아 신는 등 청빈의 사상을 실천했으며 <BR>두타행으로 가행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실제로 청화스님은 하루 한 끼 공양과 손수 <BR>빨래를 하는 등 청빈한 삶을 살아 오고 있다. 그는 '무아무소유'의 실천수행자이기도 하다.</P>
<P>그가 금타스님을 모신 지 얼마 안 되어 스님이 입적한 뒤 줄곧 스승이 쓴 유고 <BR>"금강심론"과 "수능엄삼매도" 등을 통해 수행했고 뒷날 유고를 정리하여 출판하기도 했다. <BR>청화스님은 금타스님의 "우주의 본질과 형량"을 이렇게 평가했다.</P>
<P> <BR>"금타화상의 우주론은 어디까지나 불설에 근저를 두고 불교의 우주관인 '삼천대천세계' <BR>곧 10억 우주에 관한 초유의 체계화입니다. 그 점에서 참으로 귀중한 불교문헌이며 그 <BR>분의 사상은 큰 빛이 될 것입니다.</P>
<P>40년간 토굴생활<BR> <BR>청화스님의 51년의 법랍 중 40여년 토굴생활과 장좌불와 정진은 수행자들에게 귀감이 <BR>되어오고 있다. 12년 전에는 태안사에 주석하면서 20여명의 납자들과 3년 결사의 회향을 <BR>마무리 짓는 등 수행인의 귀감이 되어오고 있다. 정통불교의 중흥을 주창해 온 청화스님은 <BR>불교가 분파된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통불교를 주장해 왔다. 그의 사상의 골격은 <BR>염불선이다.</P>
<P> </P>
<P>기자는 청화스님이 주석했던 수행처를 답사해 보았다. 청화스님은 금강선원이라는 <BR>현판을 내걸고 금강의 진리를 설파했다. 기자가 구례 사성암을 찾았을 때도 금강선원의 <BR>간판이 먼저 눈에 띄었다. 이 곳에서 청화스님은 6개월간 주석하면서 불법의 참된 진리 <BR>탐구에 전념했다. 청화스님이 주석했던 토굴들은 대부분 오지에 있다. 월출산 상견성암과 <BR>사성암 등이 그것이다.</P>
<P>현지답사를 통해 청화스님이 정토신앙에도 밝았음을 확인하게 되엇따. "정토삼부경"을 <BR>저술, 선과 염불, 정토신앙에 대해서도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청화스님이 주석했던 안성 <BR>칠장사의 경우 유가종의 원찰로 청화스님이 정중당이라는 편액을 붙이고 주석하자 <BR>수선납자들이 모여들기도 했다. </P>
<P>하루 한 끼 공양과 장좌불와의 수행법에 대해 청화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BR>"장좌불와의 수련법은 나뿐만 아니라 수행자라면 모든 사람들이 취하고 있는 <BR>수행법입니다. 또한 단식이란 사람의 신체와 정신을 유지시켜 주는 최소한의 수단일 뿐 <BR>배를 불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는 적당히 먹는 것이 수행에 도움이 됩니다."</P>
<P>30년간 물만 먹고 살고 있는 양애란씨는 청화큰스님과의 만남에 대해 "큰스님은 나처럼 <BR>물만 드시지는 않지만 하루 일중식으로 수행에 정진하시는 도인이라고 정평이 나 있다. <BR>내가 그 분을 만난 것은 나의 삶이 새로운 생명을 만난 것과 같이 기쁜 일"이라고 말했다.</P>
<P> </P>
<P>40년간의 장좌불와<BR> <BR>현장스님은 청화스님을 가리켜 한국의 밀라레빠라고 말했다. 철저한 계행으로 이름높은 <BR>티베트불교의 밀라레빠라는 단 한번도 바닥에 몸을 뉘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청화스님 <BR>또한 스승 금타화상의 수행법대로 출가 이후 40여년간 한번도 땅바닥에 누워 본 적이 없다.</P>
<P>청화스님에 따르면 일중식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토굴생활을 하다보면 혼자 여러 끼를 <BR>해먹기도 귀찮니와 먹는 것으로 시간을 뺏기면 수행에 많은 지장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BR>청화스님은 묵언정진 수행로도 유명하다. 85년 태안사에서 3년간 묵언정진을 했고, 그 뒤 <BR>미국 금강선원에서 95년 6월 두 번째로 묵언에 들어갔다.</P>
<P> </P>
<P>동리산문을 열고<BR> <BR>85년 태안사에 주석하게 된 청화스님과 태안사의 인연은 각별하다. 6.25.전란 때 화재로 <BR>인해 폐허가 되다시피 한 절을 맡아 태안사 중흥의 원력을 세우고 20여명의 도반과 함께 <BR>3년 묵언 결사를 했다. 이 결사는 지금도 불자들 사이에 신화로 회자되고 있다.</P>
<P> </P>
<P>무엇보다도 태안사와 청화스님의 인연은 염불선과의 만남이다. 여기에는 믿어지지 않는 <BR>얘기 한 토막이 있다. 염불과 선을 회통한 선사로 중국 초기 선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BR>무상선사와 청화스님 사이에 1천 3백 여년의 시공을 뛰어넘는 인연이 그것이다. 이러한 <BR>인연관계로 청화스님과 염불선 태안사의 관계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P>
<P> </P>
<P>필자와 청화스님과의 만남은 각별하다. 태안사 3년결사 회향법회 때 '바른 신앙과 밝은 <BR>생활'이라는 비디오 제작을 계기로 스님과 여러 차례 만날 수 있었다. 스님의 <BR>영상설법집을 10편을 잇달아 제작했고, 그 뒤 불교영상회보사가 기획한 "정중무상선사"의 <BR>출간을 뒤에서 돕기도 했다. 태안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염불선을 혜철선사에 의해 들여온 <BR>근원지이기도 하다. 청화스님이 태안사에 온 뒤 정중당을 세운 것도 범상치 않은 <BR>인연이다. 정중당은 무상대사가 일으킨 정중종과 이름이 같다. 물론 국제학계에 <BR>무상대사를 규명하기 전의 일이다.</P>
<P> </P>
<P>필자가 청화스님에게 정중당의 의미를 물어보았다. 청화스님은 정중당을 지을 때 <BR>무상선사의 존재를 몰랐다고 했다. 1천 3백여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기막힌 인연은 이렇게 <BR>이어진 것이다. 정중종뿐만 아니라 청화스님이 주창한 염불선이 바로 무상의 염불선과 <BR>일치하고 있으니 범상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P>
<P> </P>
<P>반면 청화스님은 필자에게 "염불선은 무상선사가 나보다 먼저 해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BR>염불선이라는 새로운 회통적 선풍은 내가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청화스님은 무상대사의 <BR>염불선에 대해 "정중무상대사" 서문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P>
<P> </P>
<P>"선과 염불을 회통한 무상대사의 교화행각은 문파와 종파를 초월했으며 불문과 종교 <BR>일반의 고질인 법집의 계박을 초탈한 선교방편은 모든 종교인의 귀감이지요." 청화스님이 <BR>주창한 염불선은 한국 불교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조사선만이 유일한 선임을 주창한 한국 <BR>불교 교단에 일대 파란을 예고한 것이다. 스승 금타스님과 송만암선사의 사상 대립도 <BR>있었지만 염불선이 추기 선불교의 핵심수행법 중의 하나라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P>
<P> </P>
<P>청화스님은 염불선의 주창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통적인 지적 성향이 강한 <BR>사람에게 걸맞을 공안선이나, 의지력이 많은 사람에게 걸맞을 묵조선을 모두 긍정합니다. <BR>그러나, 정통선 즉 염불선이란 내 마음이 곧 부처이고 천지우주가 역시 부처요, 극락 또한 <BR>내 마음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미 닭이 달걀을 품듯이 빈틈없이 틀어쥔 <BR>상태의 수행인데 지, 정, 의 모두를 요하는 회통의 방법이지요."</P>
<P> </P>
<P>염불선의 실체<BR> <BR>염불선은 무상선사가 창안한 정통적인 수행법이다. 그 수행법은 혜철선사가 이 땅에 <BR>퍼뜨린 수행방법이다. 그런데, 육조 혜능계의 남종선의 시대를 맞으면서 이 땅은 오직 <BR>조사선, 공안선만이 최고의 선수행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자연 청화스님이 주창한 <BR>염불선도 그러한 풍토에서는 뿌리를 내리기가 힘들었다.</P>
<P>그러나, 청화스님이 주창한 염불선은 한국적인 선이다. 그것은 1천 3백년 전 무상이 <BR>창안한 염불선을 마조가 잇고 마조는 서당에게, 서당은 혜철에게 염불선을 잇게 한다. <BR>동리산 태안사가 바로 혜철선사가 주석한 터전이고 청화스님이 1천 3백년 후 염불선을 <BR>일으킨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P>
<P>우리의 선불교에서 염불선이란 생소한 말이다. 청화스님은 염불선에 대해 간단명료하게 <BR>설명했다. "내가 부처임을 믿는 그 마음이 바로 염불선입니다. 염불은 원효대사에서부터 <BR>서산대사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전통이었습니다. 어느 시대 어디에서나 위대한 분들은 <BR>참선과 염불을 별개가 아니라 하나로 보고 실행하셨습니다. 우리 중생이 부처이기 때문에 <BR>내가 바로 부처임을 믿는 것이 곧 염불이죠. 그러므로 밖에서 부처를 구하면 단순히 복을 <BR>비는 방편 염불에 지나지 않지만 대상을 떠나 본체를 부처로 설정하고서 그것을 안에서 <BR>구하면 그것이 바로 염불선이 되지요."</P>
<P>실로 1천 3백년 만에 청화스님을 통해 염불선이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P>
<P> </P>
<P><BR>회통불교의 길<BR> <BR>염불선뿐만 아니라 회통불교와 통불교를 주창해 온 청화스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BR>말했다. "종파성을 지양한 원융한 원통불교는 우리 불교가 앞으로 마땅히 지향해 가야 할 <BR>부분입니다. 진리 자체가 둘이 아니고 원통무애한 것이기 때문이죠. 정통조사라고 하는 <BR>분들은 다 치우침이 없었습니다. 신라의 원효, 의상, 고려의 보조, 나옹, 조선의 서산, 사명 <BR>등 시대를 주름잡은 분들이 모두 원통불교를 부르짖었습니다. 필연적으로 회통이 안 될 수 <BR>없었는데, 원통불교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철저히 <BR>규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불성의 체험에 역점을 두어 정진한다면 원통불교로 <BR>회귀될 것입니다."</P>
<P> </P>
<P>청화스님이 연 선의 세계<BR> <BR>청화스님이 열어젖힌 선의 세계는 염불선을 바탕으로 한 통불교사상이다. "우리가 <BR>'천수다라니'를 외우든 이뭐꼬의 문자화두를 들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하든지 <BR>구경 목적은 진여불성 자리를 발견하는 길입니다." 청화스님은 "무문관"이나 "육조단경"을 <BR>들어보이시면서 진정한 불성자리를 깨달으려면 청빈한 마음자리를 발견해야 된다고 <BR>말했다.</P>
<P>"선이란 우리의 마음을 중도실상인 생명의 본질에 머물게 해 산란하지 않도록 하는 <BR>수행법입니다. 우리가 선을 닦아 삼명육통이 되면 과거나 현재, 미래를 알고 천지우주를 <BR>두루 통관하는 안목과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신통력을 모아 <BR>최상의 영생의 행복을 느낄 수 있죠. 그것이 바로 불타의 경지입니다."</P>
<P>염불선을 통해 일가를 이룬 청화스님의 선 수행은 불성체험에 역점을 두는 '선오후수'로 <BR>정진해 불성에 안주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계사 부처님 오신 날 고승초청 법회에서 <BR>청화스님은 "지금 우리는 하나의 진리로 통합을 지켜야 합니다. 회통하지 않고서는 우리 <BR>불교가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도 다른 사람의 마음도 안정이 될 수 없습니다. <BR>'부처님 오신 날'은 참다운 깨달음의 날이고, 참다운 행복의 날이요, 영생할 수 있는 우주 <BR>해방의 날입니다. 누구나 부처님 광?의 등을 켜는 날입니다."라고 말했다.</P>
<P> </P>
<P>미주포교의 시작<BR> <BR>청화스님은 95년 6월, 태안사 중흥불사를 마감하고 미국을 건너가 묵언정진 결사에 <BR>들어갔다. 청화스님이 일군 490에이커(60만평)의 미국 금강선원(Diamond Zen Center)은 <BR>서구인들에게 한국의 선을 전하는 요람</P>
<P>이 되고 있다. 청화스님이 미국으로 건너간 뜻은 달마가 남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BR>선을 전한 것과 같이 한국 땅에서 미국 땅에 선을 전하기 위한 구도의 여정이라고 <BR>술회했다. </P>
<P>"미국 불교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해서 왔습니다. 미국에는 각국 불교들이 <BR>들어와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서로 화합이 안 되어 있는 것 같아 한국불교가 그 구심점 <BR>역할을 담당하면서 각 종파간의 여러 집착과 갈등 해소를 하는데 다소라도 도움이 될까 <BR>하는 그런 뜻에서 온 것입니다."</P>
<P>청화스님은 92년 10월 카멜 삼보사 금강선원으로 미국 포교의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BR>스님은 60만 평의 금강선원 부지에 동양정신을 가르치는 미국 최대의 종합대학을 만들어 <BR>미국 속에 한국 불교의 자화상을 그리겠다고 말했다. 한국불교의 진수를 수행을 통해 <BR>실현해 보겠다는 각오였다. </P>
<P>청화스님이 이끈 한국의 제자들은 성륜불교 문화재단을 설힙하여 성륜사를 중심으로 <BR>청화스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고 있다. 성륜사 주지스님은 청화스님의 염불선 <BR>사상이야말로 오늘 이 시대에 큰 등불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P>
<P> </P>
<P>우리 시대의 큰 스승 청화 큰스님<BR> <BR>40년간 장좌불와, 하루 일중식, 우리나라 처음 염불선 제창 등 수많은 이력이 청화 <BR>큰스님을 뒤따르고 있지만, 필자가 지켜본 청화 큰스님은 '무아무소유'의 실천적 삶을 산 <BR>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다. 뿐만 아니라 폐사 일로에 있던 동리산 태안사를 중흥시킨 <BR>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P>
<P>청화스님은 24세에 출가하여 출가 이후 50년간 운문암, 진불암, 벽송사, 상견성암, <BR>사성암, 해운사 백장암 등에서 오후불식, 장좌불와, 묵언정진의 수행정진을 해오다가 92년 <BR>미국 카멜 삼보사 금강선원을 개원하고 한국 불교를 미국에 전파하고 있다.</P>
<P>스님은 95년 6월 1일부터 두 번째로 묵언정진의 결사에 들어가서 98년 해제될 때까지 <BR>정진에 여념이 없다. </P>
<P>청화 큰스님이 주창한 염불선이 중국 땅에서 씨를 뿌리고 한국 땅에서 꽃을 피워 미국 <BR>땅에 열매를 맺을 날이 그리 멀지 않게만 보이는 것은 그의 철저한 수행정신 때문일 <BR>것이다. 청화스님의 빛나는 그 결과는 우담바라같이 찬란히 피어날 것이다.  <BR>      <BR></P></TD></TR></TBODY></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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