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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최영식교수 아침칼럼] 토함산 석굴암 금강역사상 상세보기

[최영식교수 아침칼럼] 토함산 석굴암 금강역사상

정민지 2023-12-18 09:55:57

▪︎ 출연: 대구한의대 한문화건축연구소 최영식 교수

▪︎ 방송: BBS대구불교방송 라디오 아침세상 ‘아침칼럼’ (2023년 12월 15일)

(대구 FM 94.5Mhz, 안동 FM 97.7Mhz, 포항 105.5Mhz)

  안녕하십니까. 문화재수리기술위원 대구한의대학교 한문화건축연구소의 최영식 교수입니다. 

오늘은 경주 토함산 석굴암의 금강역사 조각술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경주 토함산 석굴암 금강역사는 석굴암 벽에 조각된 조각상 중에서 그 기법이 가장 뛰어난 작품입니다. 이 금강역사상은 석굴암 비도(연도) 입구 좌우에 한 구씩, 한 손은 높이 들어올리고 또 다른 한 손은 아래로 내리고 있는 형상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우람한 근육이 표현된 상체는 옷을 입지않은 나신(裸身)으로 위풍당당하게, 비도로 들어서려는 사람에게 마치 공격할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고, 하체는 바람에 나부낄 듯한 치마를 걸치고 있습니다.

  우락부락한 무서운 두 눈과, 입을 벌리거나 꾹 다물고 있는 모습은 주실의 본존불을 수호하는 듯한 강한 인상을 줍니다.

  비도 입구에 서있는 이 금강역사상은 7세기부터 등장한 우리나라의 금강역사상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나의 통석에 조각한 조각기법이나 인체의 세밀한 표현 기법은 상당히 뛰어난 수준입니다.

  금강역사상은 삼국시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을 시작으로 통일신라시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조선후기에 조영된 사찰 입구의 금강문(金剛門)과 명부전(冥府殿) 안이나 명부전 입구에도 배치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때 금강역사의 주된 임무는 부처님의 수호(守護)입니다.

  금강역사상의 조각 수법은 간다라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 왔습니다.

  석굴암의 금강역사상이 주실을 지키는 수호신이라는 점은 그 자세와 위치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비도 입구 양쪽에 힘이 넘치는 형태로 가슴과 팔뚝 근육을 나타내었으며 심지어 손등의 힘줄까지도 세밀하게 조각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금강역사상의 발가락 조각을 보면 미완성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금강역사의 상체는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지만 하체로 내려오면서 발의 일부분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도 입구 좌측 금강역사상은 두 발의 발가락이 제대로 조각되어 있지 않으며, 우측 금강역사상은 주실 쪽 오른발은 다섯 개의 발가락과 발톱까지 세밀하게 조각한 반면, 전실 쪽 왼발은 엄지발가락만 뭉툭하게 마무리 해놓았습니다. 이러한 미완성 조각 수법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불교의 윤회관에 따라, 석굴암 전실을 중유(中有)의 공간으로 가정한다면. 이곳은 윤회와 윤회를 거듭하는 중간 단계로, 새로운 탄생을 예비하는 공간으로서, 석굴암 안쪽의 주실은 온전한 생명체들의 나라이고, 비도 앞 전실은 불완전한 생명체들의 나라로 여겨서, 주실 안의 조각상들은 모두 완벽한 형체를 지니고 있는 반면, 전실의 조각상들은 불완전한 형체를 보이는 것이 불교 윤회관에서는 맞을 것으로 여겨, 금강역사의 발을 미완성으로 남겨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온전한 생명’으로 비약중인 것을 암시하기 위한 당시 석공들의 의도적인 조각 수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은 경주 토함산 석굴암 비도 입구 양쪽에 서 있는 금강역사상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