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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최영식교수 아침칼럼] 토함산 석굴암 본존불 도상의 기원 상세보기

[최영식교수 아침칼럼] 토함산 석굴암 본존불 도상의 기원

정민지 2023-11-17 10:48:28

▪︎ 출연: 대구한의대 한문화건축연구소 최영식 교수

▪︎ 방송: BBS대구불교방송 라디오 아침세상 ‘아침칼럼’ (2023년 11월 17일)

(대구 FM 94.5Mhz, 안동 FM 97.7Mhz, 포항 105.5Mhz)

안녕하십니까. 문화재청 문화재수리기술위원 대구한의대학교 한문화건축연구소의 최영식 교수입니다.
오늘은 경주 토함산 석굴암 본존불의 기원에 대하여 알아볼까 합니다.
석굴암 본존불은 왼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형' 법의를 착용하고 있고, 수인은 오른쪽 손을 무릎 아래로 내린 '항마촉지인' 자세이며, 돔 천장으로 구성된 원형 주실에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 3단 대좌 위에 봉안되어 있습니다.
미술사학자인 일향 강우방 교수는, 석굴암 본존불상의 크기는 인도 비하르주 보드가야에 있는 마하보디사원의 본존 크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석굴암 본존불과 인도 마하보리사 본존불이 같은 크기의 항마촉지인 불상인 것은, 천400년 전 당나라(唐, 618~907) 초기 삼장법사 현장(玄奘, 602~664)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통해서 이미 밝혀졌습니다.
보리수(菩提樹)를 중심으로 조영된 인도 마하보리사의 본전물은 경주 석굴암 본존불과 같은 항마촉지인 여래좌상입니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측량 기사였던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의 실측치를 따른 석굴암 본존불의 실측치와 인도 마하보리사 본존의 실측치를 비교해보면, 그 치수가 거의 일치합니다.
불상(佛像)을 실측할 때, 전체 높이와 무릎 폭은 정확히 잴 수 있지만, 불상의 어깨는 완곡한 곡선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기준점을 잡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양 어깨 치수에서 약간의 차이가 생긴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인도 마하보리사와 경주 석굴암 본존 크기의 일치는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항마촉진인의 '도상'과 '크기'와 '정동으로 향한 방향', 이 세 가지가 정확히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장법사 현장(玄奘)이 이곳을 방문하여 자세한 기록을 남긴 이에, 당나라 사신 왕현책(王玄策)은 인도를 다녀온 후에 삼장법사 현장과 동일한 불상의 치수를 전하고 있고, 당시 함께 간 공장(工匠) 송법지(宋法智)에게 그 불상을 모사케 하였습니다.
그 후 중국에서 승려들이 앞을 다투어 이를 모사(模寫)하였고, 7세기 중엽 이후 중국에서 크게 유행한 데 영향을 받아 통일신라 직후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 당시 많은 신라승들이 중국인들과 어깨를 겨루며 인도의 성지를 순례한 사실은 중국 당나라 고승 의정(635~713)의 '대당서역구법 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석가가 성도(成道)한 인도 보드가야의 마하보리사는 중국과 신라 순례승들에게 동경(憧憬)의 표적이 되어, 4세기부터 7세기에 걸쳐 중국과 한국의 수많은 승려들은 인도를 순례했고, 그 중 가장 중요한 순례지가 바로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마하보리사'였습니다.
인도로 간 현장과 의정(義淨) 같은 중국의 승려들과 당(唐)의 사신 왕현책은 보리수 밑에서 정각(正覺)을 이룬 항마촉지인의 석가모니상을 모사(模寫)한 치수를 가지고 돌아온 후에 '금강좌(金剛座)의 진상(眞像)'은 중국에서는 계속 모방되었습니다.
당시 인도와 중국, 한국의 밀접한 관계의 상황으로 본다면 그러한 모본이 한국에도 전해졌으리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항마촉지인 불상이 중국에서는 아주 짧은 기간에만 유행했던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통일기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오랜 기간 주요한 불상 형식으로 남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오늘은 경주 토함산 석굴암 본존불의 기원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