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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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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스님 시사칼럼] 선택 없이 존재하라

정민지 2023-10-04 15:26:55

▪︎ 출연: 대구 보현암 주지 선진스님

▪︎ 방송: BBS대구불교방송 라디오 아침세상 ‘시사칼럼’ (2023년 10월 4일)

(대구 FM 94.5Mhz, 안동 FM 97.7Mhz, 포항 105.5Mhz)

안녕하십니까? 대구 보현암 주지 선진(善眞)입니다.

추석 명절 편히 잘 보내셨습니까? 오늘은 ‘선택 없이 존재하라’라는 제목으로 마음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주만물의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생멸변화하고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상호 관련되어 서로 의지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타(他)자와의 관계 속에서 어떤 것도 고립되어 존재할 수 없으므로 우주와 나, 주변 환경, 삼라만상과 둘이 아닙니다.

전체와 내가 둘이 아님으로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로 구성원 전체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불교에서 연기법은 인연생기(因緣生起) 하므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라는 중중무진의 표현은 우주의 만물이 끝없는 시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는 세계관을 말합니다.

현실에서 일체의 허무와 고통도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앎의 지혜로 올바른 실천에 의해서 욕망을 없애고 이원성이 사라질 때, 이상(理想)으로서의 니르바나(열반)의 경지가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하나가 전체로 연결돼 있습니다. 전체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전체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남이란 없고, 언제나 나 자신을 만나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존중이란?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태도로 다른 사람의 의견, 가치관, 감정을 인정하며 상호작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존중은 상호간의 리듬 속에서 차이를 받아들이는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타자와 존재로서 상호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흑과 백, 선과 악, 득과 실, 아군과 적군, 옳고 그름으로 나누어 대인관계에서 내편이 아니면 저편인가? 자신과 반대의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절대선과 절대 악, 진보와 보수, 친미와 반미 등의 극단적인 이분법적으로 판단하는 사고와의 결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 야당 대표를 투표에 붙여 단식을 무력화시켜 체포영장 청구 안 가결 하는 것을 주시하면서, 가혹한 정치는 언제나 파괴적이고,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요즘 시민이 누구를 제일 두려워하는가? 의 질문에 과거권위주의 시대에는 비법률적 초법률적 폭력을 겁냈지만, 요즘은 법률적 폭력을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법의 정신이 지배가 아닌, 법을 이용한 지배를 두려워 한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우리들의 삶이 다른 양극단으로 치우치면 삶은 불행입니다. 극단에 서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세상사가 모두 불행입니다. 균형 잡힌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그냥 존재에 머물러 마음이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고, 어떤 것을 선택하지도 않을 때 우리들의 삶도 오직 중심에 머무를 수 있을 것입니다.

 

흔히 보이는 좌우 이념의 독단은 모두 다 생각이 우주의 실상과 진리를 담아낼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념은 집단이 만들어낸 망령된 생각의 감옥 입니다. 좌우 이념은 인간에게 가장 큰 해악을 입혔습니다. 근원적인 무지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 무너진 독단의 자리에 다른 독단이 대체되어 들어설 뿐입니다.

 

고향 상실의 시대에 깨어 있는 시민정신으로 부처와 중생, 너와 나, 좌와 우, 앞과 뒤,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연기의 법칙을 삶의 방식에 구현해 나가야 합니다.

깨어 있음은 생각과 생각 사이 틈새를 넓혀나가는 것입니다. 틈새란 생각의 물결은 멈추고, 영원의 한 부분인 순수의식인 텅 빔으로, 모순을 통합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살아있는 이 순간에 그냥 현존하는 것입니다. 

이만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