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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최영식교수 아침칼럼] 석굴암 창건연기 비화 상세보기

[최영식교수 아침칼럼] 석굴암 창건연기 비화

정민지 2023-09-23 14:15:22

▪︎ 출연: 대구한의대 한문화건축연구소 최영식 교수

▪︎ 방송: BBS대구불교방송 라디오 아침세상 ‘아침칼럼’ (2023년 9월 22일)

(대구 FM 94.5Mhz, 안동 FM 97.7Mhz, 포항 105.5Mhz)

안녕하십니까. 문화재청 문화재수리기술위원, 대구한의대 한문화건축연구소 최영식 교수입니다. 

오늘은 경주 토함산 석굴암의 창건 연기와 관련된, 삼국유사 효선편(孝善篇)에 대하여 알아볼까 합니다.

 

국보 제24호 토함산 석굴암은 우리 민족문화의 자존심일 뿐만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토함산 석굴암은 창건당시 석굴사(石佛寺)로 불렸으며 불국사와 독립된 별개의 사찰이었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불국사에 속한 암자의 하나로 ‘석굴암(石窟庵)’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석굴암의 창건 배경을 살펴보면 불국사와 석굴암에 대한 창건 연기를 전해주는, 일연의 삼국유사 권5 끝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효와 선행에 대한 효선편(孝善篇)에 ‘대성효이세부모 신문왕대(大城孝二世父母神文王代)’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효선편의 하나는 진정 스님의 출가와 관련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김대성의 전생과 환생 및 불국사와 석불사를 건립하는 연기와 관련된 것으로 불교와 관련시킨 효에 대한 것인데, 이는 ‘向得舍知 割股供親 景德王代(향득사지 할고공친 경덕왕대, 신라 제35대 경덕왕대에 향득 사지가 허벅지 살을 베어서 부모를 봉양하였다)’는 얘기와, ‘孫順埋兒 興德王代(손순매아 흥덕왕대, 이는 신라 제42대 흥덕왕대에 손순이 아이를 땅에 묻었다)’는 이야기이고, ‘貧女養母(빈녀양모, 가난한 여자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는 이야기를 가리킵니다.

 

첫 번째 ‘경덕왕대에 향득사지가 허벅지 살을 베어서 부모를 봉양하였다’는 이야기는 지금의 충청도 공주 땅에 신라 17관등 중 13위인 향득사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해 혹독한 흉년이 들어 아버지가 굶어 죽게 되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봉양한 사실을, 고을 사람들이 경덕왕에게 알리니 왕이 상으로 조(租) 500석을 내렸다는 얘기이고, 두 번째 ‘흥덕왕대에 손순이 아이를 땅에 묻었다’는 이야기는 지금의 경주 건천읍 모량리에 손순이라는 사람이 그의 처와 함께 남의 집 품을 팔아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고 있었는데 그의 어린 아이가 배가고파 늙은 어머니의 음식을 뺏어 먹자, 이를 민망하게 여긴 손순이 처에게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구할 수 없으니, 아이가 음식을 빼앗아 먹으면 어머니가 굶주리게 되니 아이를 땅에 묻어 어머니를 배부르게 해야겠다”며 아이를 취산 북쪽 들에 묻으려고 땅을 파다가 석종을 얻자, 부부가 이를 괴이하게 여겨 나무에 걸어두고 두드렸더니 석종소리가 너무 듣기 좋아서, 손순의 처가 “이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아이의 복인 듯 하니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라고 청하자, 남편이 처의 말을 듣고 아이와 함께 석종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 석종을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두드렸더니 종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려, 흥덕왕이 사람을 시켜 그 연유를 알게 되자 집 한 채와 벼 50석을 주어 극진한 효를 숭상하였다는 얘기인데, 뒤에 그는 집을 희사하여 절을 삼아 ‘홍효사(弘孝寺)’라 하고 석종을 안치하였다고 합니다.

 

세 번째 ‘가난한 여자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는 이야기는 분황사 동쪽 마을에 20세 정도의 여인이 비록 가난하였지만 여러 해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어느해 흉년이 들어 걸식을 하여도 살아나가기 어렵게 되자, 여인은 곡식 30섬에 자신을 팔아 그 곡식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화랑 효종랑이 곡식 100곡(斛)을 보냈고, 여기서 1곡은 10두(斗), 열말이므로, 100곡은 1,000말, 즉 쌀 100가마니를 보냈고, 또 낭도들도 租 1천 석을 거두어 보내 주었다는 것을 전해들은 신라 제51대 진성여왕은 곡식 500석과 집 한 채를 여인에게 내리고 여인이 살던 마을을 표창하여 ‘효양리’라 하였는데, 뒤에 여인은 이 집을 절로 삼고 절 이름을 ‘양존사’라 하였다고 합니다.

이상의 이야기들은 당시 신라경주에는 숯으로 밥을 짓고, 35금입택이 있었던 화려한 모습 이면에 서민의 삶을 이해하는 자료로 그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의 효사상과 경로사상의 설명을 듣고 1975년 당시 86세였던 영국의 역사가인 아널드 조지프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는 눈물을 흘리면서 “한국의 효사상은 인류를 위해 가장 필요한 사상이라며 서양에도 효문화를 전파해 달라”고 하면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라고 했는데 이를 ‘삼국유사 효선편’에 빗대어본다면, 첫 번째 이야기는 굶주린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인육을 먹인 것이 되고, 두 번째 이야기는 아이가 배가고파 늙은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어 어머니가 굶주린다는 이유로 아이를 땅에 묻으려한 것은 아동학대에 해당 될 것이고, 세 번째 이야기는 곡식을 받고 자신을 팔았다는 것은 곧 인신매매에 해당되는 것이니, 이 모두 지금 이 시대라면 엄청난 범죄행위를 저지른 것이 됩니다.

 

하지만 삼국유사 효선편 당시에는 이들은 상을 받았습니다. 즉, 이는 같은 행위라도 그 사회의 가치관에 따라서 평가가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오늘날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아니됨을 상기시켜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석굴암 창건연기의 비화로 ‘삼국유사 효선편’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