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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최영식교수 아침칼럼] 문경 김용사(金龍寺) 상세보기

[최영식교수 아침칼럼] 문경 김용사(金龍寺)

정민지 2023-06-30 10:42:52

▪︎ 출연: 대구한의대 한문화건축연구소 최영식 교수

▪︎ 방송: BBS대구불교방송 라디오 아침세상 ‘아침칼럼’ (2023년 6월 30일)

(대구 FM 94.5Mhz, 안동 FM 97.7Mhz, 포항 105.5Mhz)

안녕하십니까. 대구한의대학교 한문화건축연구소 최영식 교수입니다. 

오늘은 문경 운달산(雲達山)에 위치한 신라고찰 김용사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김용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서기 588년 신라 제26대 진평왕 10년에 운달(雲達)조사가 창건하여 사찰명을 구름 ‘雲’자에 봉우리 ‘峰’자를 쓰서 운봉사(雲峰寺)라 하였습니다.

그 후 1624년 조선 제16대 인조 2년에 혜총 선사가 중창하였으나, 1642년에 소실되어 1649년 의윤(義允)·무진(無盡)·태휴(太休) 세 스님이 다시 중건하였습니다.

 

절 이름을 쇠‘金’자와 용‘龍’자를 쓰놓고 ‘금용사’라 부르지 아니하고 ‘김용사’라 부르는 것은, 옛날 ‘金’씨 성을 가진 문경 부사가, 관(官)에 죄를 짓고 도망쳐 운봉사가 있는 운달산에 숨었다가 신녀를 만나 용(龍)이란 아들을 얻었는데, 어느 날 큰 비바람과 함께 신녀가 사라진 후, 이때부터 절 이름을 문경 부사 ‘金’씨의 성과 아들 이름 ‘龍’자를 따서 ‘김용사(金龍寺)’라 부른다고 전합니다.

김용사는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시기에는 전국 31본사의 하나로 50개의 말사를 거느린 큰 절이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김용사의 말사였던 직지사의 말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1965년에는 성철 스님이 1년간 머물렀던 곳이기도 합니다.

 

김용사의 일주문 처마 밑에는 붉을 ‘홍(紅)’자에 놀 ‘하(霞)’자를 쓴 ‘紅霞門(홍하문)’이라는 글과, ‘雲達山 金龍寺(운달산 김용사)’라는 서예가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이 두줄로 쓴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김용사는 산지 지형을 따라 석축을 쌓아 건립한 사찰입니다.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높은 축대 위에 보재루와 설선당이 있고 그 사이로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을 중심으로 마당에 들어서게 되는 전형적인 조선 중기의 산지중정형(山地中庭形) 사찰입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불을 모시고, 후불벽에는 보물 제1640호인 ‘문경 김용사 영산회 괘불도’를 걸어 놓았습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53호인 김용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단층 팔작집으로, 정면 어칸에는 6짝 세살 분합문으로, 그 양쪽 협칸에는 4짝 세 살 분합문으로 꾸몄으며, 배면에는 만살 분합문을 달아 불단 뒤에 자연 채광을 적극적으로 수용 하였고, 측면에는 출입용 외짝 세 살 청판문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대웅전 내부 바닥은 장귀틀과 동귀틀 사이에 청판을 끼운 우물마루로 마감하였고, 천정은 가운데 부분은 우물반자로 꾸미고 그 가장자리에는 빗반자로 장식해 놓았습니다.

 

절 입구에서 보면 정면에 ‘慶興講院(경흥강원)’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이 있는데, 이는 300인을 수용할 수 있는 국내 최대의 온돌방으로서, 부엌아궁이는 어린 학생들이 걸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큽니다.

또 김용사에는 시대를 알 수 없는 석조약사여래입상과, 조선 중기의 것으로 보이는 맷돌과 떡시루·쇠북·범종 그리고 지옥의 염라왕 청에서 죽은 이가 생전에 지은 선악의 행업이 나타난다는 ‘업경대(業鏡臺)’ 등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은 문경 김용사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