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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혜문 스님의 시사칼럼] 잘못된 방생은 살생이다. 상세보기

[혜문 스님의 시사칼럼] 잘못된 방생은 살생이다.

문정용 2023-03-15 16:14:25

대구 상락선원 선원장 혜문스님
대구 상락선원 선원장 혜문스님

■ 대구BBS 라디오아침세상 시사칼럼

 

■ 대구 상락선원 선원장 혜문 스님

 

■ 방송: BBS대구불교방송 ‘라디오 아침세상’ 08:30∼09:00

 

(대구 FM 94.5Mhz, 안동 FM 97.7Mhz, 포항 105.5Mhz)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봉덕동 상락선원장 비구 혜문입니다. 

 

어느 해변에서 죽은 거북이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 거북이의 배에는 빨간색의 글씨도 적혀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방생이라는 명목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 거북이는 붉은 귀 거북이라는 종으로 외국에서 수입하여 애완용으로 키워져 한때 높은 인기를 끌었다고 하고, 붉은 귀 거북이는 민물에서 서식하는 것인데, 바닷가에서 발견되었으니 붉은 귀 거북이는 방생이 된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민물에서 살아야 하는 붉은 귀 거북이에 대한 지식도 없이 바다에 놓아주었으니 이는 방생이 아니라 살생행위였던 것입니다. 

 

불교에서의 방생이란 사람에게 잡혀 죽을 위기에 처한 생명인 거북이나 어류 등을 생존할 수 있는 환경에 다시 풀어주는 의식으로 죽을 위기에 처한 작은 생명을 살려 줌으로써 내세를 위한 공덕을 쌓는 행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어진 임금이 백성들을 잘 다스리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어진 임금은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더욱 편안하고 배불리 먹으며 행복하게 살도록 할까? 늘 염려하고 고뇌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창문을 열고 그날도 백성들을 염려하고 있는 임금에게로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들어 애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임금님, 임금님, 저를 살려주세요. 독수리가 저를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제가 먹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둥지에 있는 저의 새끼들은 제가 없으면 모두 굶어 죽을 판입니다.’ 라고 애원하던 중에 창문으로 독수리가 내려 앉았습니다. 

그러자 임금님은 독수리를 향해, ‘너는 어찌하여 이 연약한 비둘기를 해치려고 하느냐? 그냥 썩 물러가거라, 라고 호통을 치자, 독수리가 이렇게 항변하였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임금님. 저는 오늘 아침에 그 비둘기를 잡아가서 저의 새끼를 먹여 키워야 합니다. 그 비둘기를 잡아가지 않으면 저의 새끼들은 굶어 죽게 됩니다. 그러니 그 비둘기를 내어놓으십시오.‘ 

 

임금님은 정말 난처하였습니다. 

비둘기를 내어 주면 품안에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비둘기에게 차마 못 할 짓이며, 독수리에게도 먹잇감을 내어 주지 않았으니 이 또한 바람직한 행위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임금님은 잠시 망설이다가 비둘기도 살리고 독수리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는데, 그것은 독수리에게 자신의 살을 비둘기만큼 떼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서슴없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도려내어 독수리에게 내어 주었지만, 독수리는 양이 적다며 받아 가지 않았습니다. 

다른 허벅지 살을 더 떼어 주었으나 역시 독수리는 양이 적다면서 비둘기와 무게를 달아 보라고 주문하였습니다. 

임금님은 평행 저울에 비둘기를 두고, 자신이 떼어낸 두 허벅지살을 올렸지만 비둘기가 더 무거웠고, 이제는 자신의 온갖 살을 다 떼어 올렸지만 비둘기의 무게에 미치지 못하자, 급기야 임금님 자기 자신의 온몸을 저울에 올렸을 때 비로소 무게가 같아졌다고 합니다. 

 

임금님은 자신의 온몸을 독수리에게 내어 주므로 비둘기도 살리고 독수리도 살리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고 정작 자신은 목숨을 잃어 천상세계에 다시 태어 났다고 하는 부처님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죽을 목숨을 살려 주는 것, 묶여 있는 생명을 풀어주는 것, 이런 것이 방생인데, 민물고기를 바다에 놓아주고, 바다 고기를 민물에 놓아주는 무지한 행위로 자신의 목숨이 연장되고 소원이 성취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엄청난 살생행위로 도리어 죄가 되는 일입니다. 

 

윤달이 다가오고 있는 요즘에 여러 사찰에서 행해지고 있는 방생법회가 정말 바람직한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의 소중함은 살코기의 양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진 임금은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여러 생명을 살렸지만,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요즘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서 죽음을 선택했을까? 궁금해지는 아침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