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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최영식교수 아침칼럼] 공주 마곡사 상세보기

[최영식교수 아침칼럼] 공주 마곡사

정민지 2022-12-16 10:12:56

▪︎ 출연: 대구한의대 한문화건축연구소 최영식 교수 

▪︎ 방송: 대구BBS 라디오아침세상 ‘아침칼럼’ (2022년 12월 16일) 

(대구 FM 94.5Mhz, 안동 FM 97.7Mhz, 포항 105.5Mhz)

안녕하십니까. 대구한의대학교 한문화건축연구소 최영식 교수입니다. 오늘은 공주 마곡사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산지가람은 크게 곡저형과 경사형, 계류형이 있는데 태화산이 품은 공주 마곡사는 계류형에 속합니다.

마곡사는 서기 640년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9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신라 승려 무선이 당나라에서 수행을 마치고 돌아와 세웠다는 설이 있습니다.   창건 이후, 신라 말부터 고려 전기까지 폐사됐다가 1172년 고려 명종 2년에 보조국사 지눌이 다시 세워 천50여 칸에 이르는 대찰로 성장했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뒤 60년 동안 폐사되는 비운을 겪었습니다.

이후 1651년 조선 제17대 효종 2년에 각순대사가 중건했지만 1782년 조선 제22대 정조 임금 때 큰불로 소실된 후 재건을 반복해 왔습니다.

옛날에 공주 마곡사는 쉽게 오갈 수 없는 오지였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은거하는 사람들이 이 절을 많이 찾았는데, 그중에는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 신자도 있었고, 인천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탈옥한 백범 김구 선생도 있었습니다.

일주문을 지나 마곡천을 따라 10분 정도 발걸음을 옮기면 마곡사 경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마곡사는 남원과 북원, 두 구역으로 나뉘는데, 남원은 영산전을 중심으로 한 수행공간이고, 북원은 대광보전을 중심으로 한 교화공간입니다.

남원에 자리한 보물 제800호 공주 마곡사 영산전은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임진왜란 때 불타 소실된 것을 1651년 조선 제17대 효종 2년에 각순대사가 다시 세운 것입니다.

영산전 편액은 세조가 쓴 것인데,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의 임금이 산사를 찾은 이유는 매월당 김시습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생육신 중 한 명으로, 당시 세조는 김시습의 재능을 높이 산 것은 물론이고 정무적 판단에 따라 그를 회유하려 했지만, 김시습은 세조가 자신을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마곡사를 떠나버립니다.

한발 늦게 도착한 세조는 신령 영(靈)자와 뫼 산(山)자를 쓴 영산전(靈山殿)이라는 글자를 써놓고, 타고 온 가마를 두고 소를 타고 떠났다고 합니다.

해탈문과 천왕문을 지나, 극락교 너머 북원에 들어서면 보물 제799호 마곡사 오층석탑과 보물 제802호 대광보전, 보물 제801호 대웅보전이 눈에 뜨입니다.

특히 높이 8.69미터의 오층석탑은 고려 때 만든 것으로, 상륜부에 ‘풍마동(風磨銅)’이라 부르는 라마탑을 올려 장식한 독특한 형식을 하고 있습니다.

라마탑은 티베트와 네팔 일대에서 발전한 라마교의 불탑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이 탑이 유일합니다.

대광보전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고 그 주변에 화려한 불화가 가득합니다. 대광보전 뒤에 자리한 대웅보전은 밖에서 볼 때에는 이층이지만, 안에서 보면 단층건물입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약사여래불, 아미타불이 있으며 그 앞에 전각을 떠받치는 굵은 싸리나무 기둥 네 개가 서 있습니다.

옛말에 이 기둥을 많이 돌면 극락길에 가까워진다고 해서 기둥 표면은 엄청 반질반질합니다. 그리고 대웅보전에서 대광보전 용마루 가운데를 자세히 보면 청기와 한 장이 보이는데, 일명 ‘극락행 티켓’으로 알려진 기와입니다.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가면 “마곡사에서 청기와를 봤느냐?”라고 묻는데, 봤다면 극락이고 못 봤다면 지옥행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공주 마곡사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