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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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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식교수 아침칼럼] 경주 황룡사 건축의 대역사

정민지 2022-10-07 09:17:50

▪︎ 출연: 대구한의대 한문화건축연구소 최영식 교수

▪︎ 방송: 대구BBS 라디오아침세상 ‘아침칼럼’ (2022년 10월 7일) 

(대구 FM 94.5Mhz, 안동 FM 97.7Mhz, 포항 105.5Mhz)

안녕하십니까. 대구한의대학교 한문화건축연구소 최영식 교수입니다. 오늘은 경주 황룡사의 대역사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대인 645년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이 왕에게 건의하여 9층목탑을 세우게 되는데 탑신 높이 65m에 상륜부 높이가 15m로 전체 높이가 83m에 이른다는 것을 신라 제48대 경문왕대인 871년에 수리하면서 기록해둔 것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9층 목탑 사리공 속의 유물 가운데 원통모양 금동 사리기는 김유신을 위한 사리기여서, 이것은 경문왕이 사리공을 열어본 883년 이후 어떤 경위로 섞였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황룡사 9층목탑 심초석 사리공에 들어있었던 유물이라면 중수 과정에서 넣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원형을 알 수 없고 출처도 없는 복원사업은 잠시 중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경주 황룡사지에 장육존상과 십대제자가 세워져 있었던 초석들이 복원과정에서 현대식 공법에 의존하게 되면 자칫 원형을 훼손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황룡사 9층 목탑지는 물론이고 황룡사 금당지도 조영 당시 한단 한단 다지며 쌓아올린 기초를 비롯하여 모든 작업들은 문화재 수리기술전문가들의 철저한 자문을 토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황룡사는 처음엔 ‘1탑 1금당’ 가람형식이었지만 나중에 동금당 서금당을 덧붙여 ‘1탑 3금당’ 가람형식으로 변용해 신라의 국찰(國刹)로 면모를 갖췄습니다. 

553년 신라 제24대 진흥왕 14년 본궁 남쪽에 궁궐을지으려다가 이곳에 황룡이 나타나자 궁궐대신 사찰로 지으면서 황룡사라 하고, 569년 진흥왕 30년에 1차 공사를 완료하였고, 584년 제26대 진평왕 6년 중금당과 동금당⋅서금당을 완공했고, 645년 제27대 선덕여왕 14년에 9층목탑을 세워, 무려 94년 동안 24대 진흥왕부터, 25대 진지왕, 26대 진평왕, 27대 선덕여왕까지 4대왕에 걸쳐 황룡사 건축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이후 황룡사와 9층목탑은 신라와 고려 두 왕조에 걸쳐, 698년 신라 제32대 효소왕 7년에 벼락을 맞아 불탄 이래 다섯 차례나 중수를 거듭하면서 593년 동안 호국사찰로 숭앙받아 오다가, 1,238년 고려 제23대 고종 25년 몽골군에 의해 가람 전체가 불타버렸습니다. 

 

현재 경주 황룡사 금당터에는 정면 9칸(52m), 측면 4칸(27m) 425평의 기단 위에 44개의 주춧돌이 온전하게 남아 있고, 금당에 모신 불상과 존상들을 받쳤던 받침돌과 좌대들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특히, 금당 안쪽 장륙삼존상을 모셨던 곳에 남아있는 3개의 좌대석 크기는 불상의 크기를 짐작케 합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석가모니불로 추정되는 본존불에는 구리 3만5천7근, 금 1만1백98푼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열 푼이 3.75g이니까 대략 구리 20톤으로 불상을 지어 붓고 금 3.8kg을 금박이나 금칠로 입힌 것입니다. 

또 양쪽 협시보살에는 철 1만2천근, 금 1만136푼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금당터 앞의 9층목탑터는 한 변의 길이가 22m에 이르고, 정면 7칸 측면 7칸의 기단 위에 지름 1m 안팎의 초석이 사방 여덟 개씩 놓여 있으며, 그 중앙에는 기둥을 받쳤던 심초석을 덮어놓은 덮게석이 남아있습니다.

오늘은 경주 황룡사 건축의 대역사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