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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최영식교수 아침칼럼] 경주 황룡사지내 목조9층탑에 얽힌 애환 상세보기

[최영식교수 아침칼럼] 경주 황룡사지내 목조9층탑에 얽힌 애환

정민지 2022-09-23 09:01:09

▪︎ 출연: 대구한의대 한문화건축연구소 최영식 교수

▪︎ 방송: 대구BBS 라디오아침세상 ‘아침칼럼’ (2022년 9월 23일) 

(대구 FM 94.5Mhz, 안동 FM 97.7Mhz, 포항 105.5Mhz)

안녕하십니까. 대구한의대학교 한문화건축연구소 최영식 교수입니다. 

오늘은 경주 황룡사 9층목탑에 얽힌 애환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황룡사 9층목탑은 927년 신라 제55대 경애왕 4년에 북쪽으로 기울어지고, 954년 고려 제4대 광종 5년에 재앙을 입은 것을 1,012년 고려 제8대 현종 3년, 당시 고려의 동경(東京) 경주에 있던 조유궁(朝遊宮)을 헐어 수리하였고, 1022년 고려 현종 13년에 네 번째로 9층탑을 중수하였습니다. 

1036년 고려 제10대 정종 2년에 낙뢰로 파손된 것을 1,064년 고려 제11대 문종 18년 다섯 번 째 중수한 후 다시 낙뢰로 파손된 것을 고려인들이 불심으로 여섯 번째 중수하였습니다. 

이처럼 황룡사 9층목탑은 신라와 고려 두 왕조에 걸쳐 593년 동안 여섯 차례나 중수되어 왔지만, 1238년 고려 제23대 고종 25년 몽골 침입 때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1976년부터 황룡사지 발굴조사 당시 황룡사지내 9층목탑지도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9층목탑지는 발굴 이전부터 금당지와 같이 기단 위에 초석이 드러나 있어 탑의 규모와 초석의 배치형식을 이미 알 수 있었습니다. 

9층목탑의 정면과 측면은 각각 7칸이며, 내부는 바깥기둥인 외진주의 초석이 기둥 선상에 배치되어 있고, 그 가운데에 심초석을 중심으로 4천주의 초석과 제1내진주 초석・제2내진주 초석 그리고 외진주의 초석 순으로, 바깥기둥 초석이 28개, 안쪽기둥 초석이 36개로, 총 64개의 초석과 하나의 심초석이 놓여 있습니다. 

 

경주 황룡사지가 관심을 받게 된 것은 1962년 1월이었습니다. 당시 문교부는 9층목탑지의 심초석 위에 조선시대부터 들어선 민가를 철거하기로 하고, 1964년 민가를 철거하자 중심 주춧돌인 심초석과 그 위의 네모난 큰 덮개석이 드러났는데, 그 해 12월 17일 심초석 아래 있던 사리장치가 심야에 도굴당하였습니다. 

도굴당한 후 2년이 지난 1966년 12월 다시 찾게 되었는데, 1966년 9월 5일 경주 불국사 석가탑 사리구를 훔치려던 일당의 소행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들은 석탑 사리구를 전문으로 도굴하는 도굴단이었습니다.

당시 도난 된 황룡사지 목탑지 심초석 사리장치는 서울의 어느 수장자에게 매도되었는데, 이를 매입한 매입자가 문화재전문가에게 감정의뢰를 하자 문화재전문가가 당국에 신고토록 권고하여, 도난당했던 황룡사지 9층목탑 심초석 사리공 유물들이 무사히 회수되어 1966년 12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굴되었던 유물이 회수되긴 했지만 타 지역의 석탑 사리 관련 도굴 유물이 섞여 있어 무엇이 황룡사지 목탑지 사리공 유물인지 구별하기 어려웠을 때, 결정적인 근거 자료가 된 것은 사리장엄구를 넣어 보관했던 사리외함의 내외면에 새겨두었던 기록이었습니다.

 

오늘은 경주 황룡사 9층목탑 심초석 사리장엄구 도난에 얽힌 얘기를 알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