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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최영식교수 아침칼럼] 경주 황룡사 목조구층탑 창건 중수 등 내력 상세보기

[최영식교수 아침칼럼] 경주 황룡사 목조구층탑 창건 중수 등 내력

정민지 2022-08-26 09:16:56

▪︎ 출연: 대구한의대 한문화건축연구소 최영식 교수

▪︎ 방송: 대구BBS 라디오아침세상 ‘아침칼럼’ (2022년 8월 26일) 

(대구 FM 94.5Mhz, 안동 FM 97.7Mhz, 포항 105.5Mhz)

안녕하십니까. 대구한의대학교 한문화건축연구소 최영식 교수입니다. 

오늘은 경주 황룡사지내 목조9층탑 창건 중수 등 내력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경주 황룡사 목조구층탑은 동서 288m, 남북 281m의 황룡사 가람 배치의 중심 불탑(佛塔)으로 건립되었으나 현재는 옛터만이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습니다. 

황룡사 구층목탑의 창건과 중수 등에 관해서는 삼국유사 탑상편 제4황룡사 구층탑조(三國遺事塔像編第四皇龍寺九層塔條)에 의하면, 자장이 당나라에서 태화(太和) 못가를 지날 때 신인(神人)과 나눈 대화에서 “신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 왜인에 접하여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침범이 잦아 걱정이다.”라고 자장이 신인에게 말하자, 신인이 “황룡사 호법룡(護法龍)은 곧 나의 장자로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돌아가 그 절에 구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고 태평할 것이다”라고 답한 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은 구층탑을 세우게 된 사상적 배경이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데 있음을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자장은 당 태종 이세민이 준 경전과 불상과 가사(袈裟)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구층탑 건립의 필요성을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였고, 선덕여왕은 군신(群臣)의 의견을 물어 백제의 장인(匠人)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기술 지도를 받고, 이간 용춘(伊干 龍春)으로 하여금 공사감독관이 되어 소장(小匠) 200인을 거느리고 완성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처음 심주를 세우던 날 공장(工匠)이 꿈에, 본국인 백제가 망하는 형상을 보고 의심하여 일손을 놓자, 갑자기 땅이 진동하고 어두워지더니 한 노승과 장사가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운 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후 공장이 후회하고 탑을 완성하였다고 전합니다. 

 

찰주기에 기록된 탑의 규모를 보면, 철반 이상 높이는 15m, 이하는 65m라 하였고, 자장이 5대(五臺)에서 받은 사리 100립(粒)을 이 탑의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 태화사 탑에 나누어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목탑을 9층으로 한 것은 이웃나라로 부터의 시달림을 막기 위함으로 1층은 일본(日本),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단국(丹國), 8층은 여적(女狄), 9층은 예맥(濊貊)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황룡사 구층목탑은 643년 선덕여왕 12년에 착수하여 645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창건 후에 탑의 중수내용을 살펴보면, 718년 신라 제33대 성덕왕 17년에 낙뢰(落雷)를 맞아 720년에 중수하였으며, 868년 신라 제48대 경문왕 8년에 탑이 진동하여 수리하였고, 872년 경문왕 12년에는 탑을 헐고 다시 세웠는데, 이 내용은 보물 제1870호 경문왕 때 만들어 넣은 사리외함의 경주황룡사 구층목탑 금동 찰주본기(慶州皇龍寺九層木塔金銅刹柱本記)에 “신라 문성대왕 때 이르러 이 대탑이 동북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염려하여 재목을 모은 지 30여년이 지나도 고치지 못하다가, 871년 경문왕 11년에 이르러 옛 것을 헐고 새롭게 만들도록 하였고, 철반 위에 무구정경(無垢淨經)에 따라 소석탑 99기를 안치하였으며, 그 소탑마다 사리 1과와 다라니 4종을 넣고 다시 경전과 사리 1구를 함께 봉안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경주 황룡사지내 목조9층탑 창건과 중수 등 내력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