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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최영식교수 아침칼럼] 고려시대 청동탑 상세보기

[최영식교수 아침칼럼] 고려시대 청동탑

정민지 2022-06-17 11:16:33

▪︎ 출연: 대구한의대 한문화건축연구소 최영식 교수

▪︎ 방송: 대구BBS 라디오아침세상 ‘아침칼럼’ (2022년 6월 17일) 

(대구 FM 94.5Mhz, 안동 FM 97.7Mhz, 포항 105.5Mhz)

안녕하십니까. 대구한의대학교 한문화건축연구소 최영식 교수입니다. 

 

오늘은 고려시대 청동탑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청동탑과 같은 금속제 탑은 사실상 가람 배치의 중심적인 존재가 아니고 건물 내의 봉안 탑으로 만들었던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건조물로서의 탑파라고 하기보다는 하나의 공예탑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탑은 원래 인도 고유의 무덤 형식에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고 예배하는 축조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불상이 제작돼 섬겨지기 전에는 탑이 유일한 예배의 대상으로 모셔졌으며 불교가 여러 나라로 전파되면서 새로 축조되는 모든 탑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실 수 없어서 진신사리 대신 탑 속에 작은 불상이나 불경, 불구 등을 넣어 모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탑은 1650년 전, 서기 372년 고구려 제17대 소수림왕 때 전진(前秦)의 3대 황제 ‘부견’이 보낸 승려 순도가 갖고 온 불상과 불경을 받아들이면서부터 고구려를 중심으로 탑이 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삼국유사에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이 요동성에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 제3대 아소카왕이 서기전 3세기에 보낸 불탑인 아육왕 토탑(阿育王土塔)을 7층의 목탑으로 세우게 했는데 나중에 탑을 줄여서 다시 세우려다 탑이 무너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북한 평양의 정릉사 절터와 평양 청암리 절터 그리고 평양 상오리 절터에서 고구려 팔각목탑지가 발굴돼 삼국유사의 기록을 뒷받침해주고 있으며, 평양 대동강변의 요동 성도 벽화고분(遼東城圖 壁畵古墳)에는 3층 목탑으로 추정되는 전각이 남아있고, 고구려의 석탑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삼국유사에 평양 대보산 영탑사에 8각 칠층석탑을 세우게 된 내력이 전해지고 있어, 현존 유물은 없지만 고구려는 목탑과 석탑, 전탑, 토탑을 모두 축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와 백제는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지와 부여 군수리 목탑지를 비롯해 경주 분황사탑, 익산 미륵사지탑 등 많은 석탑들이 전래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불탑은 가장 많이 남아있으나 대부분 석탑이고 목탑은 한 점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축조된 목탑은 모두 소실되고 조선시대 목조 5층 불탑으로 국보 제55호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만이 유일한 목탑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처럼 조선시대 이전의 목탑은 한 점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조선시대 이전의 목탑을 복원하는 일은 매우 까다로운 일입니다. 

  때문에 고려 목탑 복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유물은 고려 청동제 5층 소탑입니다.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을 주조해 만든 작은 탑이지만 고려시대에 존재했던 목탑 양식을 정교하게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고려 청동제 5층 소탑은 기단부에서 상륜부까지 온전한 형태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전체 높이는 30cm이며, 1층과 2층의 기단부에는 난간을 둘렀고 정면에 계단을 만들어 1층 문으로 통하게 했고, 2층부터 5층까지는 네 면이 모두 창문이며 각 층의 지붕은 기왓골이 선명하고, 탑의 상륜부는 찰주에 노반, 복발, 보륜, 보개, 용차, 보주가 꽂혀있는 상태로 주조되었으며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나눠 탈부착이 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와같은 고려시대 소형 청동탑은 불전의 사리탑 역할이나 탑 속에 봉안된 사리장엄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고려시대 목탑 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고려시대 청동탑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