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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최영식교수 아침칼럼] 우리나라 사찰 목탑의 변천 상세보기

[최영식교수 아침칼럼] 우리나라 사찰 목탑의 변천

정민지 2022-06-03 09:52:44

▪︎ 출연: 대구한의대 한문화건축연구소 최영식 교수

▪︎ 방송: 대구BBS 라디오아침세상 ‘아침칼럼’ (2022년 6월 3일) 

(대구 FM 94.5Mhz, 안동 FM 97.7Mhz, 포항 105.5Mhz)

안녕하십니까. 대구한의대학교 한문화건축연구소 최영식 교수입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사찰 불탑 중 목탑의 변천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사찰의 불탑은 초기에는 중국의 높은 루 모양의 목탑양식을 닮은 누각형식의 다층목탑이었습니다. 삼국시대 말기인 7세기에 백제지역에서는 목탑을 모방한 석탑이 건립되었고, 신라에서는 목탑이 먼저 발생하고 그 다음에 목탑 양식을 본받은 전탑이, 그 다음에 목탑과 전탑의 두 양식을 고루 갖춘 석탑이 우리나라 사찰 탑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현재까지 조사된 우리나라 사찰의 불탑은 천 기 이상을 헤아릴 수 있는데, 만든 재료에 따라 분류해보면 목탑과 전탑, 석탑, 모전석탑, 청동탑 그리고 금동탑 등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 사찰의 초기 불탑은 나무로 만든 목탑이었습니다. 당시 목탑의 평면은 사각형 또는 다각형이었고 탑의 높이는 여러 층으로 된 높은 누각형으로, 속세를 떠나 선(仙)계에 살며 장생불사한다는 신선의 존재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기는 신선사상의 영향 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서기 372년에 중국에서 불교가 처음 공식적으로 전해진 고구려의 경우 오늘날 남아 있는 목탑은 하나도 없고, 1938년 북한국보 제25호인 평양 교외의 청암리 절터에서 발굴된 8각기단 목탑터와, 1940년 평양 상오리 절터에서 발굴된 목탑터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백제의 경우는 1935년에 발굴 되어 사적 제44호로 지정된 부여 군수리사지의 네모난 목탑 기단 터와, 부여 백마강 남쪽 부소산 산허리 절터에 있는 목탑 터가 남아 있고, 최근 전라북도 익산 왕궁면의 사적 제405호 익산 제석사지에서 네모난 목탑 터가 발굴되었습니다. 신라의 경우는 삼국 중 가장 늦게 불교가 전해지기는 하였으나 처음부터 당탑가람(堂塔伽藍)의 건립이 왕성하여 오늘날 경주를 중심으로 한 여러 절터에서 목탑이 있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곳은 7세기에 세워진 황룡사 9층 목탑인데 이 목탑은 우리나라에 세워진 탑파 중 가장 높고 규모 또한 가장 큰 것입니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쌍탑가람 형식의 목탑으로 최초인 사적 제8호 경주 사천왕사지의 동서 목탑 터와, 사적 제7호 경주 망덕사지의 동서 목탑 터 그리고 사적 제390호 경주 보문사지의 동서 목탑 터 등이 남아 있습니다.

 

고려에 들어와서는 태조 왕건이 옛 신라의 황룡사 목조 9층탑 건립을 본받아 개경에 7층탑, 서경인 평양에 9층탑을 세워 후삼국통일을 기원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고려시대 목탑 터로는 개풍 홍옥사 터와 남원 만복사 터 그리고 전라남도 영암 월출산 천황사지에서 발견된 것이 있습니다. 고려 말에는 개경 연복사 목조 5층탑 건립을 발원하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이 를 완성시키고 역자불교이방국(亦資佛敎利邦國)이라 하였고, 그의 비(妃)인 신덕왕후 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금의 서울 성북구에 흥천사를 창건하고 목조 5층탑을 세워 여기에 사리를 봉안하게 하였습니다. 

 

17세기 초반의 조선시대 건축물인 국보 제55호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은 목조 5층탑으로 옛 목탑의 양식을 전해주고 있는 유일한 실물인데, 불탑을 팔상전이라 부르는 것은 넓은 의미의 사리 봉안 묘처를 가리키는 다른 명칭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사찰 불탑 중 목탑의 변천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