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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최영식교수 아침칼럼] 대구 앞산 안일사 상세보기

[최영식교수 아침칼럼] 대구 앞산 안일사

정민지 2022-04-08 21:34:19

■ 출연: 대구한의대 한문화건축연구소 최영식 교수

■ 방송: 대구BBS 라디오아침세상 ‘아침칼럼’ (2022년 4월 8일) 

(대구 FM 94.5Mhz, 안동 FM 97.7Mhz, 포항 105.5Mhz)

안녕하십니까? 대구한의대학교 한문화건축연구소의 최영식 교수입니다.

 

오늘은 대구 앞산 안일사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안일사는 대구의 앞산 대덕산 중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의 말사입니다.

대구의 앞산은 예로부터 고려 태조 왕건과 얽힌 이야기가 전해오는 사찰이 세 곳이 있는데 은적사와 임휴사 그리고 안일사입니다. 이 중 앞산 안지랑골에 자리한 안일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공산에서 후백제 견훤과 싸우다가 대패한 후에 팔공산을 떠나 피신하면서 은적사에서 몸을 숨기고 이곳에 와서야 편안히 쉴 수 있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편안할 안자에 달아날 일자를 써서 안일사로 이름 지었다고 전합니다. 지금도 안일사가 위치한 안지랑골 안에는 왕건이 숨어들었다는 왕굴이 남아 있습니다.

 

안일사는 1100년 전인 921년 신라 제56대 신라의 마지막 국왕 경순왕대에 영조대사가 창건한 신라 고찰입니다.

대구의 앞산은 흔히 비슬산 혹은 대덕산이라고 불리워지고 있으나 안일사가 자리한 곳은 보통 비슬산이라고 부릅니다. 달성과 현풍에 걸쳐 있는 비슬산은 예로부터 수많은 사찰이 산재하고 있는 한국불교의 또 다른 영산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안일사 절 위 500미터 지점에는 왕건이 머물렀던 왕굴이 있고 그 아래에는 장군굴과 장군 수가 있습니다. 안일사는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운동가들이 비밀리에 국권 회복 운동을 펼쳐나간 뜻 깊은 장소이기도 합니다. 1915년 1월 15일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등 13인이 이 절에 모여서 우리나라의 광복을 위해 일할 것을 서약하고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를 조직한 바 있었고 1932년 경송이 중창하였으며 3.1운동 때 3.1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민족대표 33인 중 1명인 용성이 중창하여 유성사라고도 불렸습니다.

 

1970년대 말 주지 철인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최근에 안일사는 기존의 대웅전을 헐고 대웅전 신축 불사를 시작으로 일주문과 종각, 요사채 불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현재 건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 범종루 해탈문 여사 등이 있으며 범종각에 있는 범종은 무게가 2천250kg에 이르며 삼성각에는 산신과 용신·독상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안일사 대웅전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이 있는데 조선시대의 불상입니다.

불상 내부에서 나온 조성기에 의하면 1694년에 조각승 탕밀과 보웅 등이 제작하여 경상북도에 있는 의성군 대곡사에 봉안하였던 것입니다. 불상 내부에서 나온 ‘개금불사모연기’에 따르면 불상을 1954년에 안일사로 옮기고 이듬해인 1955년에 불상의 내부를 열어 복장 유물을 조사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 불상은 목조로 제작하였으며 신체 비례에 비해 얼굴을 크게 묘사하였고 양 어깨의 통견식으로 대의를 걸치고 있으며 다리는 결가부좌하고 있습니다. 왼손은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하여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다리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가늘게 뜬 눈과 오똑하게 묘사한 코가 아주 특징적이며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양쪽 귀는 길고 두껍게 묘사하였고 턱과 목 부분을 통통한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 불상은 제작 시기와 제작자가 확실한 작품이므로 17세기 불교조각사 연구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유물이기도 합니다. 불상의 양손은 현대에 들어 복원한 것으로 추정하나 이외에는 조성 당시의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어서 2015년 5월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오늘은 대구 앞산 안일사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